보도자료
재난 이후의 마음, 회복은 혼자서는 어렵습니다
김경민 전남광역정신건강복지센터 자문의사·호남권 트라우마센터 센터장
재난은 어느 날 갑자기 일상의 한가운데로 들어옵니다. 대형 사고와 참사, 산불과 수해, 감염병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크고 작은 재난을 반복해서 겪어 왔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무너진 건물과 끊어진 도로를 복구하는 데 힘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피해는 복구의 목록에서 뒤로 밀리기 쉽습니다. 정신건강의 날을 맞아 재난 이후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재난을 겪은 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날의 장면이 자꾸 떠오르고, 작은 소리에도 놀라며,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멍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비정상적인 사건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많은 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고 주변의 지지 속에서 자연스럽게 회복합니다. 다만 일부에서는 이러한 반응이 오래 이어져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우울, 불안, 지속되는 애도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겪는 것이 약해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적절한 도움을 받으면 회복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어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도 모르게 작은 소리에 귀를 세우고, 스치는 바람에도 몸이 움츠러듭니다. 아무리 마음을 다 잡아봐도 그 긴장이 풀리지는 않습니다. 재난을 겪은 마음이 꼭 그렇습니다. 위험을 겪은 뇌가 다시 위험이 올까 봐 온몸으로 경계하고 있는 것이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똑같은 밤길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을 때는 어떨까요? 애써 진정하려 하지 않아도 어깨의 힘이 빠지고 숨이 깊어집니다. 그때는 하늘의 별이 보이고, 조금 전까지 두려움의 신호였던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회복은 이렇게 옵니다. 강한 의지나 혼자 버티는 힘이 아니라, “내 곁에 누군가 있다”, “이 사람은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는 안전감이 두려움으로 굳어 있던 마음을 풀어 줍니다.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이해받고 있다는 감각이 회복의 속도와 깊이를 바꿉니다.
반대로 그 안전감을 무너뜨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제 그만 잊어라”, “언제까지 그럴 거냐”는 말, 피해자를 향한 비난과 혐오, 반복되는 자극적인 보도, 복잡하고 더딘 지원 절차는 이미 다친 마음에 두 번째 상처를 남깁니다. 어렵게 켜진 가로등을 다시 꺼 버리는 셈입니다. 그래서 재난 이후의 회복에는 치료만큼이나 그들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환경, 곧 안전한 관계와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재난의 영향을 받는 사람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습니다. 생존자와 유가족은 물론 현장을 목격한 시민, 구조와 수습에 나선 소방, 경찰, 의료진, 공무원, 자원봉사자 등 대응인력도 재난경험자입니다. 특히 대응인력은‘돕는 사람’이라는 역할 때문에 자신의 어려움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돕는 사람에게도 안전한 곁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의 재난 정신건강 지원체계는 여러 참사를 겪으며 조금씩 자리를 잡아 왔습니다. 그러나 재난의 영향은 수개월, 수년에 걸쳐 나타나는데 관심과 지원은 초기에 집중되었다가 빠르게 줄어듭니다. 급성기 대응을 넘어 오래 곁을 지키는 체계가 필요합니다.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재난을 겪은 이웃에게 섣부른 조언 대신 곁을 지켜 주는 것, 비난과 혐오에 동조하지 않는 것, 자극적인 영상과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퍼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본인이나 가까운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1577-0199)나 가까운 정신건강복지센터의 문을 두드리시기 바랍니다.
재난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정신건강의 날,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는 이웃 곁에 우리 사회가 손을 잡고 함께 걸어 주는 사람으로 조금 더 오래 머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전남매일(www.jndn.com//179067778044046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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